이 세상에 나 홀로 남는다면? 내 옆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 숨 쉬고 있지만 난 그들을 바라볼 수만 있고, 죽을 때까지 홀로 지내야 한다면?
우주 수송선 ‘아발론’ 호는 지구에서 출발하여 인류의 두 번째 식민 행성인 ‘터전 II(Homestead II)’를 향한다. 새로운 행성에 닿는 데에 걸리는 수백 년의 기간 동안 아발론에 탑승한 모든 사람들은 동면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목적지에 다다르려면 아직 한참이 남은 어느 날, 한 탑승객이 동면 상태에서 깨어난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프레스턴. 그는 아발론이 목적지에 도착하여 자신이 깨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발론 내에 깨어난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문제가 생긴 것을 깨닫는다. 황당해하며 항해 정보를 확인해보니 도착까지 남은 기간은 무려 90년. 다시 동면 상태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살아서 도착할 수 없는 기간이다.
아발론 내를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깨어난 사람은 프레스턴 자신뿐이다. 그는 고장난 동면기를 고치려고도 해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발론 내에서 혼자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아발론의 모든 시설을 홀로 이용하며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음껏 즐겨보자고 생각하며 아발론 내부를 탐색한다. 오락실에서 게임도 해보고, 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스포츠 시설에서 농구도 하고, 바에서 음주를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자 더 이상 삶에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프레스턴은 동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프로필을 하나씩 살펴본다. 탑승객의 프로필에는 그 사람이 아발론에 탑승하기 전에 촬영한 자기소개 영상이 담겨 있다. 프레스턴이 가진 것은 시간뿐. 그는 거의 모든 탑승객들의 프로필을 열어본다. 그러다가 한 탑승객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프레스턴의 마음을 빼앗은 사람은 ‘오로라 레인’이라는 이름의 소설가.
프레스턴은 동면 상태에 있는 레인을 바라보며 그녀와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던 어느 날, 프레스턴은 동면기를 인위로 조작하여 승객을 깨어나게 하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때부터 프레스턴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레인을 깨어나게 할 것인가. 물론 그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1년을 넘는 기간 동안 홀로 지내온, 게다가 남은 삶을 홀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자신의 삶에 들여올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자신 있는가? 나는 자신 없다. 프레스턴도 마찬가지였다.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는 레인을 깨운다. 레인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깨어난다.
깨어난 레인은 프레스턴과 마찬가지로 황당해하고, 괴로워하고, 무언가 해보려 애쓰다가 포기한다. 그러나 레인에게는 프레스턴이 있었고 그 둘은 빠르게 가까워진다. 물론 레인은 프로스턴으로 인하여 자신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거짓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 레인은 칵테일 바의 안드로이드 로봇 ‘아더’와 대화하다가 프레스턴이 자신을 동면 상태에서 깨어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분노에 휩싸인다. 두 사람은 완전히 결별한다. 그래봤자 아발론 안의 한 공간에서 생활을 계속하지만.
그러한 상황도 잠시 뿐, 아발론에 문제가 발생한다. 처음에는 청소 로봇이나 자동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등의 사소한 문제였지만 그것은 인공 중력이 사라지거나 정전이 발생하는 등 점점 생존에 치명적인 문제로 번져간다. 사실 아발론 호는 프레스턴이 깨어난 때 고장이 발생하였고, 이제는 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아발론을 수리하는 일은 레인과 프레스턴 두 사람의 목숨뿐만 아니라 아발론에 동면한 채로 탑승하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이다. 하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레인과 프레스턴 뿐.
두 사람은 과연 아발론을 무사히 수리할 수 있을까? 물론, 당연히 수리할 수 있다. 모든 영화의 이야기 전개는 그러하니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재회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있으면 결코 중요한 것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 세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각자의 고통 속에 있는 레인과 프레스턴은 자신의 세계에 있는 동안에는 결코 서로 재회할 수 없었다. 아발론의 침몰 위기는 두 사람을 그들의 세계에서 끄집어내었고 그제야 두 사람은 서로의 진실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아발론에 살고 있다. 한 공간에서 숨 쉬고, 만나고, 이야기하고 살고 있지만 사실은 혼자 살고 있다. 그러한 삶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본질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페르조나를 만나는 것이다. 프레스턴이 동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동영상 프로필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삶에서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것, 누군가와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무척이나 큰 용기가 필요하고 동시에 고통이 수반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주어서 발생한 것이라 여겨지는 고통들, 사실 그 고통은 나의 페르조나가 벗겨지는 통증, 자기 스스로 만드는 상처이다. 그 과정을 거쳐야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진다.
아발론에는 칵테일 바가 있는데, 그곳에는 방문객을 상대하고 칵테일을 내어주는 ‘아더’가 있다. 아더는 안드로이드 로봇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프레스턴과 레인은 아더를 로봇으로 대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로봇이란 인간의 피조물이자 인간보다 부족한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아더는 과연 로봇일 뿐인가. 이에 대한 답을 짧은 글로 쉽게 할 수는 없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프레스턴과 레인의 행동으로 그 대답을 대신할 수 있다.
아발론이 추락 위기에 놓인 순간 레인과 프레스턴은 동분서주하며 아발론을 수리하려고 애쓰는데, 그때 이상 증상을 보이며 상처 입는 아더를 발견한다. 아더를 로봇으로만 여겼다면 그 모습을 무시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겠지만, 두 사람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아더가 더 이상 상처입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두 사람은 아발론을 무사히 수리한 후 다시 아더에게 돌아와 상처 입은 아더의 얼굴을 고쳐주고, 셋의 관계를 이어간다. 레인과 프레스턴에게 있어서 아더는 더 이상 안드로이드 로봇이 아닌 또 한 명의 동반자인 것이다.
우리는 프레스턴이기도 하고, 레인이기도 하며, 아더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따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간다. 함께 살아가는 데에는 끔찍한 통증이 수반되고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그것이 헛수고처럼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괜찮다, 그것이 삶이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은 아름다워진다.
영화 ‘패신저스’를 감상하고.